민주와 독립의 선구자(상)
신혼에 환자 치료와 의대교수를 하는 생활은 가난했다. 생계가 어려워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에 신세를 지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할 무렵 조선에서 청일전쟁으로 청이 물러나고 개화파가 득세한다. 쿠데타 동지들인 박영효가 총리대신, 서광범이 법무대신이 된다. 서재필에게도 워싱턴 주재 일본공사가 찾아와 귀국하여 외교부를 맡아줄 것을 간청하지만 거절한다. 그러나 나중에는 실각한 박영효까지 찾아와 후진된 조국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설득에 귀국결단을 내린다.
1895년 크리스마스 날, 말과 문화와 음식과 주거가 다르다고 만류해도, 남편의 나라인데 세상의 끝이라도 못 갈 리 없다고 따라 나서는 미국인 부인을 데리고 제물포에 도착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강산이 변하기는커녕 떠날 때에서 한 걸음도 나아진 게 없다. 제물포에서 서울로 가는데 버스나 기차는커녕 인력거나 마차도 없다. 그보다 백 년 전에 이미 실학자 박제가가 중국을 견문한 뒤 쓴 ‘북학의’에서 수레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도, 사람의 발 이외에는 굴러가는 운송수단이 없어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온다.
바깥세상을 모르고 암담한 조국에서는 민 씨 척족과 왕실의 부패로 농민들이 도탄에 빠져 동학 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 최초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나 외세의 개입만 부르고 실패하고 만다. 4개월 전인 8월에는 일본인들이 민비를 시해하여 뒤숭숭했다. 불과 1개월 전인 11월에는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발하여 민심을 왈칵 뒤집어 놓았다. 좋은 일도 앞뒤를 재고 해야 할 텐데,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조치가 초래하는 막무가내의 폐단이다.
그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낙담하고 상심하여 미국에 돌아가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개화파의 8년 선배이며 내부대신인 유길준의 끈질긴 설득이 그를 붙잡는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후진의 늪에 빠져 있는 조국을 구하겠느냐고 한다. 두 사람은 당시 조선에서 서구식 교육과 민주주의를 접해 본 유일한 사람들이다. 유길준은 일본유학 경험 1호, 미국유학 경험 1호생이요, 서재필은 미국 정규대학 1호생이다. 두 사람의 차이라면 유길준은 점진개화, 서재필은 급진개화파였다.
서재필을 붙잡아두게 된 유길준이 오늘날의 외무장관 격인 외부대신을 권하나, 서재필은 벼슬은 하고 싶지 않으며,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 신문을 만들겠다고 한다. 민중의 각성과 지지가 없이 엘리트 몇 사람만의 생각으로 나라를 바꾸는 개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갑신정변에서 뼈저리게 느낀 결과다. 당시 일본에는 100여 개, 미국에는 500여 개의 신문이 있었으니 생각할 여지도 없는 문제다. 유길준은 그를 중추원 고문직에 임명하여 3백 불의 각료급 봉급을 받도록 하면서 신문 발간 사업에 측면지원을 다한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이 탄생한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일본 외무성 자금으로 한성신보를 만들던 일본 측은 서재필에 대한 살해 협박 등 결사적으로 방해한다. 일본이 장악할 수 없는 신문이 나오면 조선을 조종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관파천이 벌어지면서 일본세력이 약화되어 신문 발행이 가능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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