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망명과 미국 내 독립운동(상)
개혁은 늘 반동과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다. 사대주의에 물든 관료들과 부패한 탐관오리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자 개혁의 적대세력이 된다. 기득권층의 반발이다. 서재필이 전파하는 자주와 독립사상이 왕권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으로 왜곡된다. 귀국한 갑신정변의 역적인 서재필을 처단하거나 홀대하지 않고 통역으로 쓰는 등 높이 평가해 온 고종조차 친러파에 둘러싸여 판단에 혼동을 일으킨다. 서재필이 주장하는 정치체제는 입헌군주제인데도, 간신들은 서재필이 왕을 없애는 제도를 퍼뜨리고 있다고 고종을 오도한다.
1898년 3월에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이승만은 왕실이 친러정책을 거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실과 독립협회가 대립한다. 정치와는 무관하게 계몽에만 몸 바쳐 온 서재필이 정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형국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왕실이 서재필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종용한다. 추방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상황이기도 하다.
1898년 5월, 서재필은 2년 4개월간의 귀국활동을 청산하고 울분을 머금고 다시 조국을 떠난다. 34세의 나이다. 다시 망명 아닌 망명이다. 윤치호에게 맡긴 독립신문은 얼마 못가 1899년 12월에 폐간되고 독립협회도 문을 닫고 만다. 주 3회 나온 독립신문은 부수로는 3천부였으나 전국에 뿌려졌다. 신문 하나를 많은 사람이 돌려보기도 하고, 버리지 않고 계속 두고 읽기도 하였으니, 당시의 1,200만 인구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할 것이다.
이후 조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잃고, 급기야는 합방이 된다. 세계지도에 Korea는 없고 한반도는 일본말인 Chosen이라 적혀, 외국인들은 Korea가 어디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조선 강탈은 지식인들의 대혼란을 가져왔다. 사실 그 이전까지 서재필, 이승만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일본을 동양의 앞서가는 국가요 믿을 만한 이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일본이 러시아를 물리친 것을 같은 황인종의 승리로 환호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야욕을 예견치 못한 뒤늦은 후회로 그들은 40여년의 남은 일생을 독립을 찾는데 바쳐야 했다. 참으로 불운한 세대다.
필라델피아로 돌아온 서재필은 미국인 고등학교 후배와 문방구와 인쇄업을 시작한다.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의사보다 사업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또한 지식인도 돈을 벌어야 하며, 입만 갖고 남의 돈으로 활동해서는 안 된다는 생활철학에서다. 사업은 50여명의 종업원을 둘 정도로 번창한다.
1차대전의 종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나라 잃은 민족의 가슴을 다시 들끓게 한다. 고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샹하이에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교포들도 흥분한다. 하루 임금 3달러의 한인 노동자들로부터 피땀 어린 독립의연금이 답지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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