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망명과 미국 내 독립운동(하)
1919년 4월 14일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미국 각지의 모든 한인들을 불러 모은다. 미국 내 3.1운동이다. 서부에서 동부까지 미국 전역에서 독립을 서러워하는 150여명의 한인들이 집결한다. 집회를 제1차 한인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라 하였다. 서재필이 의장이 되어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사색하는 일본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여 조선의 독립을 호소한다. 이승만 등 모든 한인들이 조선의 독립을 외치며 필라델피아 시내를 행진한다. 수십 년이 흐르고 동포가 2백만이 된 오늘날에도 미국 내 한인 대표자들이 모두 모이는 한인총대회는 아직 없다.
그러나 힘없는 민족의 독립운동은 허공의 메아리로 사라졌다. 이상주의자를 자처하는 윌슨이 주창하는 민족자결주의는 1차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경우에나 적용되어 폴란드 같은 나라가 독립하지만,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는 나라들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은 물론 서울에도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미국인은 없었다. 서울의 알렌 공사까지도 본부에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워싱턴 외교의 거두 조지 케넌은 정치인들에게 “한국은 미개국이다”고 가르쳤다. 2차대전 후 신탁통치가 논의될 때까지도 계속된 미국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이다.
이후 서재필은 임시정부의 한국홍보국(Korea Information Bureau)을 맡아 Korea Review라는 월간지를 만들고 각종 한국 관련 자료를 만들어 한국 알리기에 앞장선다. 한국을 이해하는 미국인들을 모아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게 한다.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 일본에 병합된 나라인지 조차 모르던 시절이다.
한인들은 1921년 11월부터 석 달간 열리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또한번 기대를 해본다. 임시정부의 외교공관 격인 구미위원회가 적극 활동토록 하고, 이승만 위원장, 서재필 부위원장을 임명한다. 서재필은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하딩 대통령, 휴즈 국무장관을 만난다. 미국대표들에게 청원서를 보내고 미국 의원들을 동원하여 한국문제를 토의에 포함시키고자 백방 노력한다. 그가 하딩 대통령 등에게 보낸 장문의 영문 호소문 등은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 외교관들을 무색케 한다.
그러나 한국문제는 의제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조선의 독립은 무망했다. 일본은 동양의 맹주요 1차대전의 전승국이다. 냉엄한 국제정치의 틀 속에서 조선은 강국들에게 안중에도 없다. 서재필은 한국문제로 시간과 정력을 다 바쳐 건강이 상하고 사업체는 남의 손에 넘어간다. 가진 집만 남기고 가진 재산 8만 불을 모두 날려 빈털터리가 된다. 의사도 건강을 위해 장기간 휴식을 명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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