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세 되시는 어머님이 생존해 계셔서 한국을 자주 방문하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그래서 사실은 자주 한국을 다녀오는 형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방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방문이었다. 1977년이니까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7년을 시무했던 교회가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2대 담임목사였던 우리 내외를 초청한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강산이 3번 변했을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는 우리를 잊지 않고 왕복 비행기 표가 동봉된 초청의 서신과 함께 40주년 기념 특별 부흥회에 강사로 초빙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잊어져있던 그립던 세월을 뒤돌아보며 성실하게 준비하여 떠나 최선을 다하여 말씀을 증거하고 돌아왔다.
그랬다. 군목에서 막 제대한 30대 젊은 나이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열을 쏟던 목회지였다. 내가 시무한 교회는 인천직할시 부평 중부 감리교회다.
그 당시 부평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있던 낙후된 지역으로 미군 기지가 있었고 중소기업이 간간이 농지 빈터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인근에 나환자들이 정착을 목적으로 양계장을 운영하며 살던 곳이기도 했다. 연탄가루가 꺼멓게 날리는 역전 부근에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부평이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 초라하던 부평역은 초현대식 롯데 마트가 들어선 4층 역사로 바뀌고 시원하게 트인 역 앞 광장과 사방으로 뚫린 지하상가는 동, 남대문 상가를 방불케 하는 번화한 상가였고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교회도 8명의 교역자와 장로 10명, 권사 107명, 집사 200명으로 임원실수가 317명에 1,000여 명이 넘게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40주년 행사는 참으로 성대하였다. 그 중에 40년의 발자취를 담은 동영상 상영은 감회가 깊었다. 30년 전으로 우리를 되돌려 놓아주었다. 젊고 예뻤던 아내, 천진스러운 우리 아이들, 패기가 넘치던 내가 거기 있었다. 만난을 무릅쓰고 매입했던 최초의 주택 이야기, 교회가 자라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지었던 18평짜리 교육관, 역전에 나가 수줍어 어쩔 줄 모르며 노방 전도하던 모습, 그때 함께 신앙생활 했던 모든 역사와 교인들이 거기 있었다.
이미 하늘나라에 가신 분들,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성도들, 경원대학과 충주대학 교수가 된 그 때의 학생들, 장로가 되어 모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2명의 장로님과 목사가 되어 목회하는 동역자 3분이 거기 계셨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세월의 흔적이었다. 세월은 가도 흔적을 뚜렷하게 남는가보다. 좀 더 아름답고 귀한 흔적을 남길 껄 아쉬운 마음이 앞을 가려 동영상을 보는 동안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기억이 이제와 생각해도 콧날이 다시 또 시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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